
영화 <명량>은 2014년 개봉한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 첫 번째 작품이다.
최민식 배우가 이순신 장군을 연기했으며, 이후 <한산: 용의 출현>과 <노량: 죽음의 바다>로 이어지는 시리즈의 시작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가장 강하게 기억에 남았던 것은 단순히 조선 수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이미 결과를 알고 보는 역사 영화다.
그런데도 전투가 시작되면 긴장된다.
왜냐하면 영화가 보여주는 명량해전은 처음부터 승리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두려움에 빠져 있고 함선은 부족하다.
적은 눈앞까지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이순신은 싸우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나에게 <명량>은 단순한 전쟁영화라기보다 '두려움을 어떻게 용기로 바꿀 것인가'를 보여주는 영화에 가깝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조선 수군
영화의 배경은 1597년이다.
조선 수군은 칠천량해전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뒤 사실상 무너진 상태였다.
조정은 다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상황은 절망적이다.
싸울 수 있는 함선은 너무나 부족했고 병사들의 사기도 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누구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병사들도 두려워하고 장수들도 전투를 피하고 싶어 한다.
영화 속에서 이순신은 적군보다 먼저 이 공포와 싸워야 한다.
개인적으로 <명량>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도 바로 이것이었다.
두려움을 이용해야 한다
이순신은 영화에서 두려움에 대해 계속 고민한다.
일본군이 강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런 적을 상대로 싸우라고 명령한다고 해서 갑자기 병사들이 용감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죽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면 명령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영화 속 이순신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단순히 어떤 진형으로 싸울 것인가가 아니다.
이미 패배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전장으로 데려갈 것인가다.
이 점에서 <명량>은 <한산: 용의 출현>과 상당히 다르게 느껴진다.
<한산>에서 박해일의 이순신은 잘 훈련된 수군을 움직여 자신의 전략을 완성하는 지휘관에 가깝다.
반면 <명량>에서 최민식의 이순신은 완전히 무너져버린 조직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는 지휘관이다.
그래서 최민식 배우의 이순신은 훨씬 무겁고 처절하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대장선
그리고 마침내 명량해전이 시작된다.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긴장됐던 순간은 일본군의 수많은 함선이 몰려오는 장면보다 이순신의 대장선이 앞으로 나아가는데 다른 조선 함선들이 움직이지 않는 장면이었다.
이순신은 싸우러 나갔지만 부하들은 두려움 때문에 쉽게 따라가지 못한다.
결국 대장선이 앞에서 적을 상대한다.
여기서 영화가 보여주려는 이순신의 모습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뒤에서 부하들에게 싸우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위험한 곳으로 먼저 들어간다.
그리고 버틴다.
처음에는 멀리서 지켜보던 조선 수군도 대장선이 계속해서 버텨내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한다.
공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생기기 시작한다.
영화 초반부터 계속 이야기했던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다'는 의미가 실제 전투를 통해 완성되는 순간이다.
명량의 이순신이 가장 처절하게 느껴졌던 이유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을 모두 보고 나면 세 배우가 연기한 이순신의 차이를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개인적으로 <명량>의 최민식이 연기한 이순신은 세 작품 가운데 가장 처절하게 느껴졌다.
<한산>의 박해일은 냉정하게 전장을 설계하는 지휘관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노량>의 김윤석은 오랜 전쟁을 견디고 마지막 책임을 다하려는 장군처럼 느껴졌다.
반면 <명량>의 최민식은 모든 것이 무너진 상황에서 혼자서라도 버텨야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큰 목소리로 병사들을 선동하는 영웅적인 모습보다 혼자 고민하고 두려워하면서도 결국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그래서 나 역시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됐다.
내가 저 상황이었다면 과연 싸울 수 있었을까?
이미 한 번 버림받았던 장군
이순신의 이야기가 더욱 대단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명량해전 이전의 상황 때문이다.
이순신은 전쟁 내내 승리만 하며 아무런 어려움 없이 명량까지 온 장수가 아니다.
모함과 정치적인 문제 속에서 파직됐고 고초를 겪었다.
그리고 자신이 오랫동안 만들어왔던 조선 수군 역시 칠천량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다시 통제사로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만약 평범한 사람이라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오히려 자신을 의심하고 처벌했던 조정이다.
그런데 다시 나라가 위험해지자 자신에게 돌아와 싸워달라고 한다.
나였다면 다시 싸울 수 있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도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존경한다.
명량해전이 지금까지 기억되는 이유
명량해전은 압도적으로 불리한 전력 속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상대로 승리한 전투로 기억된다.
대중적으로는 흔히 '12척 대 330척'이라는 숫자로 알려져 있다.
다만 실제 전투의 정확한 함선 수와 교전 규모는 기록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설명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단순히 12척이 330척 전체와 동시에 싸워 모두 격파했다고 이해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조선 수군이 극도로 불리한 상황에서 일본 수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승리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승리가 중요했던 이유는 단순히 함선을 많이 격파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칠천량 이후 사실상 무너졌던 조선 수군이 다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점도 중요하다.
영화에서도 바로 그 부분을 강조한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까지 사람들을 지배했던 것은 공포였다.
하지만 전투가 끝났을 때 그 공포는 자신감으로 바뀌어 있다.
백성들이 함께 만들어낸 승리
<명량>에서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백성들의 모습이다.
전쟁은 장군과 병사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전쟁이 벌어지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아가던 백성들이다.
영화는 명량해전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전투가 위기에 빠졌을 때 백성들 역시 승리를 위해 힘을 보탠다.
영화적 연출이 강하게 들어간 부분도 있지만, 이러한 장면을 통해 영화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했다고 생각한다.
이순신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 사람의 용기가 주변 사람들에게 퍼지고, 결국 많은 사람이 함께 움직이면서 승리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내가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는 이유
내가 역사 속 인물 가운데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한 명 고르라고 한다면 이순신 장군을 선택한다.
단순히 전투를 잘했던 장군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크게 다가온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자신을 믿지 않는 조정과도 싸워야 했다.
가족을 잃는 개인적인 비극까지 겪었다.
그런데도 자신의 자리를 버리지 않았다.
특히 명량해전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눈앞에 보이는 조건만 놓고 보면 싸우지 않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으로 보일 정도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바다를 지켜야 했다.
그리고 이순신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선택했다.
그 점에서 나는 경외감에 가까운 감정을 느낀다.
명량이 지금도 재미있는 이유
<명량>은 역사 영화이기 때문에 결말을 이미 알고 본다.
이순신이 승리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재미있다.
개인적으로 그 이유는 이 영화의 진짜 질문이 '이길 수 있을까?'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패배를 확신하고 있을 때 누가 먼저 앞으로 나갈 것인가?'
오히려 이것이 <명량>이 던지는 질문에 가깝다.
이순신은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영화는 그 역시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결국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한 사람이 앞으로 나가자 다른 사람들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나에게 <명량>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승리보다 '용기'다.
용기란 두렵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두려워도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순신 3부작의 시작
<명량>을 재미있게 봤다면 <한산: 용의 출현>, <노량: 죽음의 바다>까지 이어서 보는 것을 추천한다.
세 작품은 같은 이순신을 다루지만 서로 다른 배우가 각기 다른 시기의 이순신을 보여준다.
<한산>에서는 전략가의 모습을, <명량>에서는 절망 속에서 사람들의 공포를 용기로 바꾸는 모습을, <노량>에서는 7년 전쟁의 마지막까지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세 작품 중 가장 처절한 이순신을 보여준 영화가 <명량>이라고 생각한다.
최민식 배우의 무게감 있는 연기와 긴 시간 이어지는 해전 역시 여전히 볼 만하다.
그리고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 질문 때문에 나는 지금도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고, <명량>을 다시 보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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